과거 노근리 학살사건을 범위를 넘어 그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갑니다.
노근리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작은 산골마을의 지명이 아닌 국내외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인권 및 평화의 브랜드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의 많은 땀과 눈물이 있었다. 2001년, 한·미 양국의 진상조사가 발표된 이후,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는 미흡했던 노근리 사건 진상규명에 대해 정확한 재조사를 촉구하며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해 왔다.
특히 노근리특별법 제정을 위해 국회에 입법청원서를 제출하고 2년 가까이 헌신적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2004년 2월 9일, 국회에서 노근리사건의 희생자 및 유족들의 심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노근리사건특별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노근리사건특별법에 의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노근리사건의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여 218명을 희생자로, 2,170명을 유족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2006년부터 시작한 노근리평화공원 조성사업이 착공 5년만인 2011년 9월 완공되었다.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는 노근리평화연구소와 긴밀히 연계하여 오래전부터 노근리사건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평화증진활동도 펼쳤다. 그결과, 노근리사건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렸고, 노근리평화연구소가 출간한 ‘한국전쟁기 인권침해 및 역사인식의 문제’라는 연구논문집이 2009년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는 등 역사 및 인권 관련 분야의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는 1998년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는 제 1회 합동 위령제를 사건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개최한 이래 매년 이어오고 있다. 또한 2011년, 청주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등 도시를 순회하며 노근리사진전을 열었고, 2002년에는 정구도 유족회 부회장의 저서 ‘노근리는 살아있다’를 원저로 하는 연극 ‘노근리’가 극산 ‘새벽’에 의해 청주와 영동에서 공연되었다.
또한 유족회는 노근리평화연구소와 협력하여 초·중·고 학생들에게 인권 존중과 평화애호사상을 함양하고자 노근리 인권백일장 및 독후감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2007년부터는 기존의 문화행사외에 국내외의 저명학자들을 초청하여 노근리 국제평화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인권 및 평화증진을 위해 기여한 국내외의 개인이나 단체를 격려하기 위해 매년 노근리평화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이었고, 그것은 비극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역사였다. 사람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피난을 떠났다. 첫 포성이 들린지 6일 미군이 참전했다. 미군은 패배했고 뒤이어 더 많은 미군이 들어왔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참패를 당한 미군은 영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근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산골마을 임계리의 여름은 바빴다. 멀리서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했지만 땅이나 파먹고 살던 이들에게는 농사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런 그곳에 갑자기 미군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미군들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고향마을을 떠나 피난길에 나서야만 했다.
사람들은 설마 자신들 같은 촌무지렁이들을 어떻게 해야겠냐는 마음을 끌고 그렇게 미군의 강제 인솔하에 주곡리 마을 앞을 지나, 다시 밤길을 걸어 하가리로 들어갔다. 밤은 깊어갔고 피난민들의 불안과 공포는 어둠보다 더 깊었다. 그렇게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그런데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던 미군들은 남으로 철수하고 없었다.
10년 같은 공포의 밤을 꼬박지샌 피난민들은 경부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서송원리부근에 이르자 미군이 피난민대열을 가로막고 경부선 철로 위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피난민들은 지친 몸을 끌고 올라 갔다. 그리고 철길을 따라 걸어 노근리 부근에 이르렸을 때 미군들은 피난민들의 짐수색을 하였고, 미군들이 어디론가 무전을 보내자 정찰기 한대가 그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천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전투기들이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 위로 폭격과 기총소사가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26일, 그 여름의 뜨거운 햇빛은 붉게 더 붉게 타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살기 위해 남쪽으로 옮기던 발걸음은 노근리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950년 7월 26일 정오무렵, 미군은 그렇게 사람들을 쌍굴에 가둔 채 총을 쏘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 중 몇몇 건장한 남성들은 어둠을 틈타 가족들의 눈물을 뒤로 하고 탈출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쌍굴에는 많은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미군의 공격에 힘없이 죽어갔다. 믿을수 없게도 총격은 3박 4일, 70여 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2010년도에는 노근리 사건의 아픔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키고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평화의 메시지를 심기위해 노근리사건을 교향곡으로 작곡한 “노근리여 영원하라”라는 제목의 심포닉 칸타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외국인 학생인터뷰 한국인 학생인터뷰지난 2005년부터는 ‘세계대학생 노근리 인권평화캠프’를 개최하고 있다. 이는 노근리 사건의 핵심가치인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미래의 지도자가 될 세계 각국의 대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노근리현장을 세계 인권, 평과 교육장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정구도 박사님 인터뷰반세기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뭍혀있던 사건의 진실...
영문도 모른채 숨져간 그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50년간 노력했던 피해자들을 우리는 가슴속 깊이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전쟁 없는 세상, 밝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 노근리 사건현장은 죽음의 땅에서 생명과
평화의 땅인 노근리평화공원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는 남아 기억된다. 1950년 7월의 노근리는 이들에게 평생동안 지울 수 없는 뼈아픈 상처, 한국 현대사의 큰 흉터로 남아있다. 한국전쟁의 숨겨진 악몽은 그렇게 그들만의 아픔으로 조용히 묻힐 줄 알았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고 그 진실은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정은용 회장님 인터뷰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후 10년이 지난 1960년 가을, 노근리사건의피해자 정은용씨는 피해자 몇 명의 서명을 받아 미국정부에게 공식사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청서를 제출하며 노근리사건의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역사의진실을 지키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인권유린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믿음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 그 어디에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5.16군사 쿠테타 이후 군사정군이 들어서자 미국의 잘못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은용씨는 노근리사건을 알리기 위해 문학적 방법으로 눈을 돌렸다. 1994년 4월 15일, 10여년의 준비와 집필 끝에 노근리사건을 내용으로 하는 실화소설을 출간했고, 이를 계기로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대책위원회의 대변인과 기획위원을 맡은 정구도씨는 보다 체계적인 진실규명운동을 위해 학문적인 연구 및 내외신 언론사를 적극 활용하여 사건을 홍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결과, 1998년 4월, AP통신 서울지국 최상훈 기자가 취재를 시작했고, 마침내 1999년 9월 30일 AP통신에 의해 노근리사건의 실상이 전 세계에 전파됐다.
그후 전 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노근리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루기 시작했고, 군내외 여론이 들끓자 한·미 양국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노근리사건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단지 ‘협력’의 필요성만 강조되고 정보의 공유는 없는 양국 각각의 진상조사였다. 그런 반쪽짜리 조사를 끝낸 후, 2001년 1월, 한.미 양국 정부는 노근리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보고서가 아닌 각각의 조사 결과보고서와 양국의 공동 이해의 형식으로 불과 7쪽의 ‘한.미 공동발표문‘을 발표하였다.
사건발생 50년 만에 비로소 미국정부는 6.25전쟁 당시 노근리 일대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살상사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하며, 진실의 촛불이 불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미국 클린터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햇지만... ‘사과’가 아닌 ‘유감’표명성명서... 우리는 죽었고 죽인 사람은 없었다. 미국 참전군의 증언
미국 참전군의 증언민원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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