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노근리 학살사건을 범위를 넘어 그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갑니다.
지난해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보고서 작성 당시 국방부뿐 아니라 외교통상부도 보고서 작성업무를 맡은 소기획단에 정치적 의견을 제기한 사실이 14일 새롭게 드러났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외교부는 소기획단의 보고서 작성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말 기존안에 대해 수정의견을 보냈다. 외교부가 당시 제시한 수정의견을 보면 국방부의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이에 따라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진실규명보다는 미국에 대한 배려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가능한 한 미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려는 게 범정부적 시각임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소기획단은 당시 검토 끝에 외교부의 의견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교부는 지난해 12월23일 제4차 기획단회의에서 확정된 원안 내용 가운데 ‘노근리사건의 보도로 인하여 국내외적으로 비등하는 여론에 밀려 미국 정부는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꾸었다’라는 문구에 대해 ‘미 정부는 클린턴 대통령, 코헨 국방장관 등 미 정부 최고위측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한·미관계의 중요성,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 신속한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으므로 이 문구를 삭제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제기했다.
소기획단은 “미국 정부가 하루 만에 입장을 선회했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며 외교부 수정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발간된 보고서에서는 ‘국내외적으로 비등하는 여론에 밀려…’라는 부분이 ‘국내외적으로 여론이 비등하자…’로 바뀌어 표현돼 있다. 당시 소기획단 관계자들은 표현이 바뀐 경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외교부는 또 ‘여러 중대한 증거들에 의하면 당시 미군 지휘부로부터 민간인에 대한 공격명령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문구에 대해서도 삭제 의견을 제시했다. 소기획단 회의시 주장에 대한 평가 또는 판단은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게 이유였다. 소기획단측은 이에 대해서도 “주장이 아니라 노근리 사건의 배경을 기록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라며 일축했다.
국제관습법 조문을 명시한 부분에 대해서도 외교부는 “보고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군이 노근리에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단정짓게 할 우려가 있다”며 삭제하라는 의견을 보냈다. 미군에 대한 전범죄 논란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소기획단은 “국제관습법의 일반적인 규정을 언급한 것”이라며 외교부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한 소기획단원은 14일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고 한·미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외교부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실제 외교부가 내놓은 의견을 보면 그 선을 넘어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고은기자 freetr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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