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노근리 학살사건을 범위를 넘어 그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갑니다.
1997년 11월. 나는 그동안 모은 자료와 방송테이프를 가지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방문해 도움을 청했다.
내 얘기를 유심히 듣던 당시 KNCC 총무 김동완 목사는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앞으로 보냈다. 또 KNCC는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측에 협조를 구해 미 국방부에 노근리 사건에 대한 공개 질의서를 보내는 데 힘을 보탰다.
한편 부친은 한국과 미국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청주지구배상심의회에 신청한 손해배상금 지급 신청이 기각됐다. 주한미군 배상사무소는 청주지구배상심의회에 보낸 회신에서 “사건 당시 노근리에 미 제1기갑사단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없다”며 거짓 답변을 보내왔다.
이에 부친은 법무부 앞으로 청주지구배상심의회의 기각결정문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제1기갑사단의 노근리 주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첨부한 장문의 재심청구서를 제출했다.
1997년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미 팔십을 바라보는 노구를 끌고 애쓰시는 부친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피해자들이 불쌍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나는 노근리 사건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논문을 쓰겠다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이런 내 결심에 대해 하나님이 도우셨다. 1998년 3월 어느 날. 당시 MBC 워싱턴 특파원이던 김택곤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노근리 사건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자료들을 보내주면서 편지 한 통을 동봉했다.
“이제까지의 연구결과로 볼 때 미 제1기갑사단이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것은 확실하다. 더 구체적인 연구에 필요한 미 제1기갑사단 예하 부대들의 전투일지 및 작전명령서 등을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 달라”는 부탁의 글이었다.
몇 개월 뒤 김 기자는 워싱턴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내게 100여장의 자료를 건네주었다. 자료를 검토해보니 중요한 문서들이 제법 많았다. 연구에 대한 공신력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으로 논문을 쓸 역사학 전공 교수를 수소문하다가 충북대 최병수 교수를 만났다.
내가 공동연구를 제안하자 최 교수는 기꺼이 동의했다. 우리는 5∼6개월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고 드디어 1999년 2월 충북대 ‘인문학지’에 노근리 사건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AP통신의 탐사보도가 나오기 7개월전으로 학계 최초의 노근리 사건 연구 논문이었다. 나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노근리 사건 역사 논문을 직접 쓰셨다고 믿는다.
99년 3월에 미 육군성이 미국 NCC 질의서에 대해 답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주한미군배상사무소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제1기갑사단의 관련기록을 검토했으나 미 육군이 노근리 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절망의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계셨다.
98년 4월초 AP통신 서울지국 최상훈 기자가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노근리 사건에 대해 관심이 있으니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내가 4년전 외신기자들에게 부탁했을 때 유일하게 AFP통신만 작은 기사를 썼었다. 그런데 AP통신 최상훈 기자가 제발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전도서 기자가 말했듯이 만사는 다 때가 있나 보다. 하나님은 시간표대로 때가 되매 최 기자를 보내주신 것이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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