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노근리 학살사건을 범위를 넘어 그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갑니다.
내 당초 계획은 부친의 책 출간을 도와드리는 것까지였다. 그런데 “사람이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내 계획과 전혀 달랐다. 하나님은 나를 서울로 옮기신 후 하나님께서 예정하고 계신 시간표에 따라 단계적으로 일을 맡기셨던 것이다.
실화소설이 출간된 후 내 생각이 바뀌어 소설책에 대해 언론홍보만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책에 들인 공이 적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건의 진실이 알려졌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책 홍보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4년 5월초 사건 현장을 직접 취재해 보도한 한겨레신문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이런 것도 기사화될 수 있으며 앞으로 사회적 이슈화도 가능하리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부친에게 노근리사건 피해자대책위를 구성하도록 하고 스스로 대변인직을 맡았다.
이후 나는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사건의 이슈화에 매진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순조롭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언론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실망스러웠다.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그 일을 5년간 계속해나갔다. 아마 그 기간에 만난 기자만 해도 족히 100명은 넘을 것 같다. 그때 느낌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흡사했다.
부친은 한·미 정부와 한국 국회에 진상조사와 해결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수차례 제출했다. 그러나 외면과 거절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인권단체들도 무반응,무신경으로 대했다. 이런 상황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상황과 비슷했다.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다. 그러나 그 시대의 지도자였던 제사장이 외면하고 지나갔다. 그 다음 레위인마저도 황급히 지나갔다’는 장면이 연상됐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한 미군을 철석 같이 믿었다. 미군이 안전지대로 피란시켜주겠다고 해 따라나섰다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을 그 누구도 거들려고 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아닌지,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노근리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절실하게 느꼈다.
1994년 여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틈만 나면 사건 해결을 위해 국회도서관과 광화문에 있는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북한문서자료실을 찾던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문서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노근리 사건 발생 직후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그 상황을 자세히 보도한 ‘조선인민보’(1950년 8월19일자) 기사였다. 그 문서의 원본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었고 한국전쟁 관련 자료 100만건 중 하나였다. 하나님은 산더미 같은 문서 중에서 내가 꼭 필요로 하는 바로 문서를 찾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전율했다. 그리고 자료를 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지금도 나는 하나님께서 미국과의 역사전쟁에 대한 승리의 징표로 그 자료를 찾게 해주셨다고 굳게 믿고 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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