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쏴 버려 - 시론(성신여대교수 김영호)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이 여지없이 표출되는 현장이다. 우리는 동서고금의 전쟁사에서 민간인의 희생과 같은 비극적인 측면을 수없이 본다. 한국전쟁 중 발생한 노근리 사건은 전쟁이 갖는 그러한 비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진실 규명을 통한 명예 회복과 미국의 공식적인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해 왔다. 지난 50년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어온 이들의 요구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작년 1월 미국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한미공동발표문에서 이 사건이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살상사건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1주일을 남겨두고 이례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미국 연방정부의 예산으로 추모비 건립과 장학재단 설립을 약속한 바 있다. 그로부터 이미 1년이 지났음에도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美軍 양민학살"사실로▼
미국 정부의 약속 이행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작년 한미공동발표문의 발표 이후 수습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듯 하던 이 사건은 최근 영국 BBC방송이 2월 1일 방영할 예정인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새롭게 발굴된 미국 측의 일부 문서들과 증언들에 기초하여 미국 측의 공식적인 발표 내용과는 상반된 주장을 제기하여 이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특집물은 민간인 사살 명령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명령서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고, 노근리 이외의 지역에서도 민간인 희생이 미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미공동발표문 발표 이후에도 그 발표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거나 누락된 내용들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한미공동 조사의 내용이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BBC 방송의 특집물이 공동발표문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뒤집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번 일은 양국의 조사가 미온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국립문서처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단, 연대, 대대의 작전일지들이 모두 보관되어 있고 50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일반의 열람이 가능하다. 미국 문서처에서 3년간 자료를 수집한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미국 측이 고의로 문서들을 감추거나 폐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미국의 공식적인 발표 이후 꾸준히 미국 측의 새로운 문서들이 미국의 정보자유법에 근거하여 비문해제 과정을 거쳐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노근리 사건을 포함하여 여타 사건들의 의혹에 대한 진실 규명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문제는 이번 문제를 처리하는 우리 정부의 미온적인 자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문서의 발굴에 의해 이번과 같이 또 다른 논란이 재연되지 않도록 정부도 민간 학자들로 구성된 전문가들이 노근리 사건을 포함하여 의혹이 있는 부분을 국립문서처에서 철저하게 조사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실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 사이에 일어난 노근리의 비극은 미국이 부산방어선의 구축을 통해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반격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촌각을 다투던 시기에 발생했던 것이다.
방어선 구축을 위해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7월 26일 미군에 대하여 낙동강 전선으로의 철수를 지시했다. 7월 31일 대구전선을 방어하고 있던 미 제25사단이 마산지역으로 재배치됨으로써 부산방어선은 극적으로 구축되었고, 미국은 반격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한국전쟁 초기 미국에는 가장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것이다.
▼진상규명 서둘러야▼
이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지휘체계가 무너진 소규모 단위의 부대가 일으킨 노근리에서의 양민 살상에 대해서 미국은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고, 이 점은 이미 작년 공동조사발표문에서 미국도 인정한 바다. 이번 2월 한국을 방문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 처리와 관련하여 이미 미국이 약속한 바를 이행함으로써 이 사건을 수습하고 미래지향적인 한미동반자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북한 눈치 보기에 너무 급급하지만 말고, 이번 BBC방송의 한국전쟁 특집 방송을 계기로 이미 KBS가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으로 제작해 두었지만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방영하지 못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특집물이 방영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노근리 사건의 비극을 넘어서 한국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것이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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