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의 멋과 향기를 느끼고 몸과 마음에 여유를 지닙니다.
난계의 피리 이 글은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인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 제8권에 실려 있는 박연에 대한수필로 음악가 박연의 고매한 삶을 피리를 통해 잘 나타나 있다.
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은...
영동(永同)의 유생이다. 젊었을 때에 향교(鄕校)에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다. 제학(박연)은 독서하는 여가에 겸하여 피리도 배웠다. 온 고을이 그를 피리의 명수(名手)로
추중(推重:추앙하여 존중히 여김, 제자들이 스승으로 추중한다는 뜻)하였다.
제학이 서울에 과거보러 왔다가 이원의 피리 잘 부는 광대를 보고 피리를 불어 그 교정(校正)을 청하니,광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節奏:가락)에도 맞지 않으며, 옛
버릇이 이미 굳어져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고 하였다. 제학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고 하고, 날마다 다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듣고는 말하기를, “규범(規範, 법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고 하였다. 또 수일 후에는 광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제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 뒤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거문고 · 비파의 여러 악기를 익혀서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世宗)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드디어 발탁 등용(拔擢登用)되었다.
관습도감제조(慣習都鑑提調)가 되어서 음악에 관계되는 일을 전담(專擔)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은...
제학이 말하기를, “어느 음률(音律) 일분(一分) 높고, 어느 음률이 일분 낮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보니 음률이 높다고 한곳에는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세종이 찌꺼기의 일분을
떼어내라고 명령하였다. 또 음률이 낮다고 한곳에는 다시 찌꺼기 일분을 붙였다.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 음률이 바르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다 그의 신묘(神妙)함을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이 계유의 난에 관여하여 제학도 또한 이 때문에 벼슬이 파면되고 시골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한벗들이 한강 위에서 전별하였는데 제학은 필마(匹馬)에 하인 한 사람을 거느린 쓸쓸한
행장이었다.
함께 배 안에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다가 소매를 잡고 장차 이별하려 할 즈음에 제학이 전대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었다. 그리고 떠났다. 듣는 이가 모두 쓸쓸한 느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글은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용재총화(용齋叢話)’ 제8권에 실려 있는 박연에 대한수필로 음악가 박연의 고매한 삶을 피리를 통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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