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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우리 나라 3대 악성의 한 분인 박연(1378∼145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선생의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이며 본관은 밀양으로 영동군 심천에서 태어났다. 태종 11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를 거쳐 세종 즉위년(1418)에 관습도감 제조가 되어 음악에 전념하고, 동 7년(1425)에 악학별좌가 되어 당시의 불완전한 악기의 율조를 정리하여 악서를 편찬하였다.그 후 편경을 만들고, 궁정에서 향악을 폐하고 아악을 연주케 하는 등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동 1..
설계리 농요는 모찌기 노래. 아시매기(초벌매기), 두벌매기로 구성되었으며 5음 음단 계면조 노동요의 일종으로서 설계리 농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생활 속의 기쁘고 슬프고 즐거움 애절함을 소탈하게 호소한 내용이 담겨진 노동요로서 지금껏 주민들에 의해 손상됨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75년 전국민속경연대회 출전하여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 받았다.
이 탑은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석천 계곡 위로 1km 떨어진 탑벌에 있던 것을 195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 한다. 지대석 위에 1층의 기단을 이루고 그 위에 탑몸돌을 올리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올려져 있는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초층의 탑 몸돌에 비해 2층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으며, 초층의 지붕돌 받침은 5단인데,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이 정려문(旌閭門)은 조선 선조(宣祖)때부터 영조(英祖)때 까지(1574∼1733) 덕수이씨가문에서 배출한 효자(孝子) 6인과 효부(孝婦) 2인에 대한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영조 40년(1764)에 한곳에 모아 건립한 것이다. 선조 7년(1574) 지극한 효도로 신령이 도와 꿩이 집으로 날아들어 부친을 봉양 하였다는 이학수(李鶴壽), 숙종 32년(1706) 손가락을 깨물어 부친의 병을 구한 이탱(李 ), 시부(媤父)에게 침입한 강도를 설복(說服)시킨 관성전씨(管城全氏), 할머니의 소원을 위해 눈 덮인 산에서 감귤을 얻었다는 이..
이 재실(齋室)은 율재 정경(鄭瓊)이 돌아가신 후에 후손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던곳으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저조 경술년(1790년)에 중건하였다 한다. 재실의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송담재의 부속 건물인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살림집으로 약 3백여년 전에 지어진 초가집 건물이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 당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변형되었다가 2001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경(1490∼1564)은 16세기 초엽..
이 부도는 원각국사비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부도의 확실한 주인공은 알 수가 없다. 둥근모양의 이 부도는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또한 아래 위의 연꽃 잎이 한 잎인 점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둥근형의 탑몸돌과 팔각형의 지붕돌(屋蓋石)을 서로 결합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지붕돌의 기와골과 합각마루(박공 위에 있는 마루)의 장식은 비교적 무디어 졌다. 지붕돌 위에 정교한 보주(寶珠)가 있어, 각 부분의 형식이 완전하게 존재하는 부도탑이지만,..
이 부도는 원각국사비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부도의 양식은 석종형(石鐘形:돌로 된 종 모양)인데,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아래 위의 연꽃 잎이 한 잎인 점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석의 연꽃 잎과 연꽃 잎 사이에는 작은 간엽(間葉)을 만들었으며, 탑몸돌 위에는 보주(寶珠:탑의 꼭대기에 얹는 장식)가 있다. 이 부도는 6매의 석재로 만들어 졌으며, 전체 높이는 190cm이다.
이 곳은 고성 남씨의 재실(齋室)이다. 순조 28년(1828) 3월에 남주한(南周漢)이 선대의 묘소 아래에 처음 지었다. 1885년에 고쳐 지었으며 1929년에 중수하였다.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중앙의 2칸은 넓은 대청으로 하고, 양끝에 온돌방을 만들었다. 특징은 굴뚝이 없는데도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나오지 않고 불꽃이 내부로 빨려 들어가 열효율을 극대화한 구조를 하고 있는 점이다. 1938년 일본의 건축학 교수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 뜯어본 결과 온돌이 2중..
이 곳은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고향에 돌아온 안요(安燿:1481∼1546) 선생이 지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네가 난 바에 욕됨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무첨이라 하였다. 중종 17년(1522)에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9년(1872)에 일부가 불탄 것을 중수하였다. 그 후 1911년과 1948년, 1995년에 중수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정교한 기법의 건물이다. 안요 선생의 본관은 순흥이다. 이조판서(증직..
이 곳은 고성 남씨 수일파 문중에서 후손들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명종 원년(1546)에 옥계서당 이라 하여 처음 세웠다. 그 후 순조 4년(180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화수루라 이름을 바꾸어 후손들의 강학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정면과 측면 각각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2칸은 누마루로 난간을 돌렸고, 뒷면 2칸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있는 누정 형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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