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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덤은 [말무덤]으로 전해 오던 석실분(石室墳)이다.도굴된 상태에서 1993년에 발굴 조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석실의 규모는 남북의 길이 2.4m, 너비 1.6m 높이 1.7m이다.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7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된다.신라의 김흠운(金欽運:?∼655) 장군이 백제와 조천성(助川城)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실과, [양산가]와 관련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장지현(1536∼1593) 장군의 전적지로서, 순절비와 사당이 있다.순절비는 고종 1년(1864)에 송환기가 비문을 지어 세웠으나 일제에 의해 매몰되었다.이후 다시 찾아 전적지인 오룡동에 세웠다가, 1980년에 사당이 있는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사당인 충절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집으로 1978년에 세워졌다.장지현은 자는 명숙(明叔), 호는 삼괴(三槐)이며, 본관은 구례이다.선조 23년 (1590)에 천거되어 전라병사 신립의 부장이 되었고, 이듬해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
예로부터 전란으로 인하여 명장, 명현의 시신을 찾지 못하거나, 묘를 잃어버린 경우에 단을 만들어 묘소를 대신하는 것을 단소라고 한다. 이 단소는 전객시령 김영이와 한성 판윤 장비의 후손들이 단소를 세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고려 말 몽고족의 침범으로 국가 기강이 흔들리고 치안이 마비되어 나라를 바로 잡을 방도를 잃었던 때에, 영산군 김영이는 사위 세 명 (이부시랑 박원용, 한성판윤 장비, 대제학 박시용)을 데리고 낙향하여 나라를 걱정하며 후생을 교육시킨 은자로 명망이 높았다.후에 김영이와 둘째 사위 한성 판윤 장비의 묘소가 없어지..
박흥생(1374∼1446)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자는 경부, 호는 국당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태종 때에 대제학을 지낸 문간공 박시용(국당의 할아버지) 이 영동으로 집을 옮겨와 이 고장의 토성이 되었다.그는 상촌 김자수의 문인으로서 학문에 정진하여 13세에 진사, 17세에 생원에 급제하였다.세종 때 여주·춘천의 향교 교수를 거쳐 1423년 창평현령을 지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는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사육신과 함께 동학사 초혼각(1904년 숙모전으로 개칭)에 배향(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되어 있다.또한 종제인 난계 ..
이 무덤에는 김수온(1409∼1481) 선생이 안장되어 있다.묘비와 장명등 및 문인석이 있다.김수온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 또는 식우( )이며 본관은 영산이다.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세종 23년(1441)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에서 {치평요람}과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불경 등의 국역 사업에도 공이 컸다. 벼슬은 여러 요직을 거쳐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었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시호는 문평(文平)이다.부조..
이 무덤에는 박연(1378∼1458) 선생이 안장되어 있다.묘소에는 묘비와 망주석이 있다.박연은 조선 초기의 음악가이다.자는 탄보(坦夫), 호는 난계이며, 본관은 밀양이다.영동군 심천에서 태어났다.태종 11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를 거쳐 세종 즉위년(1418)에 관습도감제조가 되어 음악에 전념하고, 동 7년(1425) 악학별좌가 되어 당시의 불완전한 악기의 율조를 정리하여 악서를 편찬하였다.그 후 편경을 만들고, 궁정에서 향악을 폐하고 아악을 연주케 하는 등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동 15년(1433)..
이 비석은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이 이곳에 잠시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정조 3년(1779)에 세운 것이다.정면과 측면 각 1칸의 맛배지붕집의 비각 안에 있다.선생은 한천팔경의 하나인 이곳에 초당을 짓고 한 때 강학하였다.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유허비가 세워졌다.그 후 이곳에는 한천서원을 세워 우암을 향사하였으나, 고종 초에 철폐되었고, 1910년에 한천정사를 세웠다.
이곳은 고려 말의 문신인 김자수 선생의 유적지이다.유적으로는 선생과 그의 후손이 대대로 살았던 선지당(先志堂)과 후손의 효자 정려각이 있다.선지당은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길러내던 곳이다.지금의 건물은 중종 때(1506∼1544)에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의 팔작지붕집으로 중간 3칸은 대청이다. 순조 16년(1816)에 중수하였다. 순조(1800∼1834) 초에 후손 김노경이 『선지당』이라 당호를 써서 걸었으며, 김정희의『장의자손』이란 친필 편액이 있다.선지당의 좌측 전면에 있는 정효각은 9대손 김은..
이 무덤은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방형의 석실분(石室墳)으로 봉분이 무너지고 도굴된 상태로 발견되었다.내부의 네 벽은 12∼14단으로 다듬은 돌로 쌓았으며, 남북의 길이가 355㎝, 폭이 210㎝, 높이가 145㎝이다.남쪽에 연도 시설이 있으며, 2매의 거대한 덮개돌로 덮고 있다. 봉분은 없어졌으나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이 곳은 고성 남씨 남지언(南知言:1507∼?)이 말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강당이다.남지언은 자를 신지(愼之), 호를 삼괴당이라 했으며, 본관은 고성이며, 남인(南寅)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장인 김시창에게 배워 학행이 높아 향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효행으로 천거되어 김천찰방에 임명되어 잠시 나갔다가 사임하고 돌아와 강당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순조 2년(1802)에 중수하였다.당 안에는 한원진의 「삼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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