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삼(朴事三)은 17세기 중엽의 인물로 호는 안정(安定), 자(字)는 여일(如一)본관은 충주이다. 일찍이 산수를 좋아하여 지금의 김천시 대항면에 이주했을 때 옥천에 있는 중봉 조헌 선생과 성리학을 강론 하다가 선생의 동서가 되었다. 그는 효행이 출천(出天)하여 효종 7년(1656년)에 장사랑사옹원참봉(將仕郞司甕院參奉)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그의 사후에 세운 묘표는 현종 10년(1669년)에 박사삼의 아들 일석(一石) 박유동(朴惟東)의 청으로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저술했고, 비문 글씨는 그의 손자 헌장이 써서 입석했다.묘표의 규모는 비 전체높이가 147㎝, 비신(碑身)이 97㎝, 비 두께가 10㎝이며,박사삼의 자세한 행적을 새긴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으나, 석재 자체에 포함된 금속성분으로 인하여 사암화 현상 및 부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 비석은 서해바다에서 이곳까지 운반했다는 전설이 있는 해석(海石)으로유리와 같이 투명하고, 거울 같은 돌로서 매우 희귀한 석재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