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10일경 화재로 목조여래좌상이 전소되어 도지정문화재 지정이 2013. 11. 8일 해제되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중화사는 1960년에 간행된 『영동군지』에 의하면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에 보각국사가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서산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유재란(1597년) 당시 소실되었던 것을 숙종 3년(1677)에 대웅전 등을 중수하였고, 정조 21년(1797)에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순종 융희 2년(1908)에 다시 중창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목조여래좌상은 중앙에 모셔진 본존상으로 나발의 머리 위에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나발은 또렷하게 조성하였다. 원만한 상호에는 이마에 백호가 양각되고 양, 미·안, 비량, 구순 등 각부가 정제되었다. 양쪽 귀는 짧은 편이나 목에 돌려진 삼도와 잘 어울리어 근엄하면서도 인자함을 느끼게 한다.
법의는 통견하였는데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두툼한 옷깃은 오른쪽 팔굽 밑으로 하여 오른쪽 어깨를 덮고 있는 의문과 연결되었다.
수인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놓아 촉지인을 취한 듯 하고 왼쪽 손은 왼쪽 허리부분에서 상장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다.
최근에 불상들을 개금 봉안하였는데 이 여래좌상에서 두 가지의 발원연기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그 중 하나는 1928년(소화3년)의 묵기로 (크기 44.5cm×51 cm) 「개금불상」이라 제하여 이때에 개금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크기 23cm×495cm) 주불 석가여래, 좌보 미륵보살, 우보 제화갈라보살, 관음불, 이 4존에 대한 조성관계자들 및 시주자들의 성명을 적고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발원문 내용에 따라 강희25년 병인 즉 조선 제19대 숙종12년(1686)에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측치 (cm) : 全高 94, 頭高 33, 肩幅 37, 胸幅 24, 膝幅 57, 膝高 16. 腹藏孔 24×14이다.
대웅전 삼존상의 왼쪽에 배치되어 있는 보살좌상은 머리에 금속제의 보관을 썼는데 각종의 화문과 화염문 등을 장식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며 뒤편에까지도 높직하게 보주형 관면을 이루고 있다. 흑발의 보발은 곱게 빗어 관대 밑으로 질서 있게 표현하였으며 양쪽 관대 밑으로 길게 보발이 흘러 이타를 휘감고 어깨 위에서 두 가닥으로 갈렸다.
원만한 상호는 이마에 백호가 양각되고 양 미·안, 비량, 구순 등 각부가 정제되었다. 양쪽 귀는 짧은 편이나 목에 삼도의 표현이 있어 원만한 상호와 잘 어울리어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러운 인상이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쪽 어깨에서 널찍한 옷깃이 내려져 제전에서 큼직한 원호를 이루었다. 양쪽 팔에 걸친 의문은 밖으로 흘러내려 동체를 감싸고 있다.
수인은 오른쪽 손을 약간 들어 상장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으며 왼쪽 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 반외장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다.
이 보살좌상은 여래좌상과 함께 최근에 개금 봉안하였는 데 여래좌상과 같은 내용의 발원문이 발견되었다.(크기 22cm×488.5cm)
실측치(cm) : 全高 89, 頭高 45, 肩幅 20, 胸幅 23, 膝幅 50, 膝高 16.이다.
목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은 조성연대를 알려 주는 복장 묵기(복장 묵기)가 있어 절대연대가 확실하며 개금(개금)의 과정과 본래의 소속 사원 등과 같은 연혁이 확실하여 동시기의 불상 제작편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범우고(범우고)』,『가람고(가람고)』, 『태고사법(태고사법)』,『여지도서(여지도서)』등의 기록이 전하여 존상의 형태가 완전한 것은 물론 각 부의 조각양식이 정제되어 있어 17세기 불상 양식을 규명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2013년 화재로 전소되면서 2013년 9월 13일 문화재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