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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답사기28, 송호관광지
양산팔경의 중심지 송호관광지
송호관광지가 위치하는 양산면은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와의 끊임없는 견적지로 신라 태종 무열왕(655) 2년 백제와의 싸움에서 순국한 김흠운 장군의 죽음을 애도한 양산가의 발산지이다.
송호관광지가 위치하는 양산면은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와의 끊임없는 격전지로 신라 태종 무열왕(655) 2년 백제와의 싸움에서 순국한 김흠운 장군의 죽음을 애도한 양산가의 발상지이다. 어려서는 화랑 문노(文努)의 낭도로서 명예와 기개를 중시하였던 김흠운은 태종무열왕의 사위이며, 신문왕의 장인이었던 인물이다.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을 막고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겨 정벌할 것을 계획하고 군사를 동원할 때, 그를 낭감대감으로 으로 삼았으며, 그는 장수로서 권위 세움 없이 사졸들과 비바람을 맞으며 동고동락을 하고 전장에 임했다한다.
김흠운이 전장에 나가 죽은 사연은 이렇다. 그가 백제지역에 도달하여 양산 밑에 진을 치고 백제의 조천성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백제군이 야음을 타고 기습을 해와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주변은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어서 지리에 밝은 백제군이 숨어서 공격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때 그를 호위하는 병졸이 적과 맞서려는 장군을 말렸다. “지금 적이 어둠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고, 만약 죽는다면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공은 신라의 진골이며 대왕의 사위이니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며 말리자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이다. 어찌 감히 명예를 추구하겠느냐?”며 그는 칼을 뽑아들고 적과 싸워 장렬히 전사했다. 그 소식을 접한 보용이라는 장수는 “그는 골품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와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다. 더구나 나 보용은 살아도 이익이 될 것 없고, 죽어도 손실 될 것 없다.”하며 적진으로 달려가 적 수삼인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으며 또다른 장수 예파, 적득도 보용과 같이 전사하기에 이른다.
신라의 진골이며 대왕의 사위인 김흠운은 최고의 배필 공주를 맞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만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 모든 권세와 영화를 전장에서의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었던 그는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죽음으로 갚았으며, 신라인의 기개를 바로세운 충절열사(忠節烈士)로 사서에 기록 되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그와 그 전투를 소재로 많은 문장가 들이 양산가를 쓰게 된다.
온갖 권세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장밋빛 인생이 보장된 삶을 뒤로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충절은 많은 신라장수들의 교훈이 되고 후에 통일신라가 있게 했다. 신라의 진골로서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제도적장치가 있음에도 전장에 뛰어들어 위기를 장렬한 전사로 맞선 그. 그 개인의 삶을 놓고 봤을 때 전장에서의 죽음을 택하지 않았더라도 비난받지 않을 상황이어서 더욱 놀랍고 안타깝기도 하다.
시에는 역사와 시를 결합시킨 독특한 양식으로, 영사시(詠史詩)라는 것이 있다. 그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어 이미 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이 양식은 역사에 대한 정서적 인식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매력적인 수법으로 이용되었다. 영사시는 시인이 역사속에 자신을 투입하여 역사속의 인물과 공감하면서 영탄(詠嘆)하는 것이 본령이라서 보통 서정시의 일종을 구성하지만, 사실관계를 구조로 삼아 서사시 성격을 지니는 경우도 없지 않다.조선 초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세종13-성종23)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많은 문장과 시문을 남긴 인물이다. 김종직은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신라 충신과 관련하여 양산가라는 영사시를 남겼는데 충절이라는 주제와 김흠운장군의 양산전투가 주된 소재로 이름하여 ‘양산가’이다. 이 영사시는 김흠운을 비롯한 네 장부를 국난을 당하여 목숨을 바친 의연한 용맹을 칭송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당대의 명 문장가가 남긴 몇 안 되는 영사시의 한 작품이다.
적국이 큰 맷돼지처럼, / 우리 변방을 먹어 오는데 / 씩씩하도다 화랑도여! / 나라 위해 몸 바침에 딴 생각 없었다네. / 창 들쳐 메고 처자식과 헤어져, / 미숫가루 먹고 샘물마시다, / 적들이 밤중에 성루로 쳐들어오니 / 의연한 넋이 칼끝에 날렸구나. / 머리 돌려 양산의 구름 바라보니, / 우둑 우뚝 무지개 빛깔 같네. / 슬프도다, 네 장부여! / 그대들은 끝내 씩씩한 사나이. / 천추에 응걸한 넋이 되어, / 함께 제삿술 드옵소서
김종직의 ‘영산가’이다.
참고문헌:詠史樂府 陽山歌 考察(嚴元大), 詠史樂府의 褒貶性 考察(金塋淑), 韓.中.日의 詠史樂府(심경모), 金宗直 詠史樂府의 一考察(洪性旭)
송호관광지 매표소를 들어서면 곧장 송림으로 이어진다. 수령300년이 넘는 수백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이곳에 김종직의 “양산가” 시문이 적혀 있는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 조형물은 “우리민족의 영원한 숨결과 항전을 재조명하는 뜻에서 북을 형상화하였다”고 하는데 양산가를 음미하며 송림을 거니는 마음에 하늘을 찌르듯 키 높은 소나무가 화랑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아 사뭇 감회가 새롭다.
후일의 일이지만 황산벌전투에서 아들을 적진으로 내보내 죽게 한 김유신 휘하 장수나 전장에 나가기 앞서 처자식을 죽이고 5만의 신라군을 5천의 군사로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 싸운 백제의 용장 계백장군의 충심 또한 충격적이다.
당군이 서해로부터 진격해 들어오고 5만의 신라군이 논산의 득안성으로 백제를 치기 위해 진격해 들어오는 가운데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당백(一當百)의 신라군에 맞서야 하는 계백장군은 막막했을 것이다. 아무리 용맹한 군사들이라 할지라도 10배가 넘는 적군에 어떻게 대항해 맞서 싸울 것인가? 수적 열세를 만회하려면 군사들로 하여금 죽을 각오로 싸울만한 투지를 심어주어야 했을 것이다. 죽음의 전장으로 가는 길에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가족을 칼로 베어 죽인 것은 그의 비책이 아니었을까.
계백의 오천결사대가 지금의 논산지역에 속해 있는 황산벌에서 10배의 군사와 맞서 싸운 황산벌 전투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격전을 거듭한 끝에 신라군을 4번을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끝내 수적 열세에 밀려 마지막 전투에서 대부분 최후를 맞이한다. 자신의 처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나라를 구하려던 계백의 충심은 그렇고 수적우세에도 불구하고 4번이나 후퇴를 거듭한 신라 김유신 진영도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때 신라의 장군인 흠춘이 아들 반굴(盤屈)을 적진으로 보내 힘껏 싸우다 죽게 했으며, 장군 품일 역시 아들 관창(官昌)을 내보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게 하여 결국 죽게 했다. 반굴과 관창의 용감한 모습에 감격한 신라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신라는 이겼으나 이기지 못했고 백제는 졌으나 지지 않은 모순의 싸움이라 해도 뉘 뭐랄까. 서로 위기에 맞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린 비책을 택한 결과의 소치이리라.
황산벌 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충의전사(忠義戰士)들의 전투였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자식과 가족까지도 내어 놓는 이 충심은 지금의 세태로는 도저히 용납되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설화 같은 역사적 사실이다. 자신의 존재는 나라가 있음으로 비롯되었고, 나라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되어지는 것이던가?
신라 화랑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린나이에 전장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청년들도 그 아비들도 백제의 맹장 계백과 그의 처자도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던졌다.
베트남의 피난민. 소위 보트피플로 불리었던 피난민들은 망망대해에 배를 띄우고 공산화된 나라를 탈출하여 세계각지로 뿔뿔이 흩어졌었다. 우리나라도 그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부산과 인천에 피난민 수용소가 설치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라가 없어지면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존도 소멸되는 사건의 목도였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독립투사들, 우리민중들, 그들도 그 정신을 이어받았기에 절망 속에서 민족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해방은 빛을 발했고, 자주독립의 기치를 세계만방에 떨칠 수 있었다. 살신충의의 그 피비린내 나는 항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해방이 되었던들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
요즘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한류열풍’은 선조의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가능했을까. 세계의 경쟁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문화를 전파하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은 그래서 위대하다.
다소 격앙된 마음을 송림의 바람에 날리고 벤취에 앉아 역사 속이야기를 되뇌어 본다. 내가 그들이라면 어떻게 행동 했을까...?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양산에 후손들이 스스로 국민관광지라 칭하고 휴양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물과 숲은 한여름 나기에 좋은 환경이어서 예부터 산수(山水)를 즐기는 솜씨가 남달랐던 우리민족 후예들의 작품이다.
송호관광지는 전설속의 동물, 용과 선녀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자연을 벗 삼은 선조들의 풍류가 서려 있는 영동군의 명소이자 고대국가간의 싸움터에 속하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강물에 갇혀 외로운 바위하나, 강물과 어우러져 멋스러운 암벽과 암봉 하나에 조차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연을 담아놓고 즐기는 우리네 정서를 빼다 꽂은 양산팔경이 대부분 모여 있는 장소이다.
300년을 훌쩍 넘는 수령의 소나무가 수백그루 모여서 숲을 이루는 광경이 궁금하다면 영동군의 송호관광지로 가 보라!
고개가 절로 꺽이는 소나무의 훌쩍한 키와 저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소나무의 용틀임은 우리 민족을 닮았다. 험난한 역사를 넘나들며 자존과 의리와 충심을 지켜왔던 우리 민족의 기개가 그곳에 있으며, 그 역사 속에서 민족의 흥을 마음껏 뿌려 힘든 시절을 이겨냈던 지혜로움이 그곳에 있다.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고 그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상은 변천을 맞는다. 소위 문화란 것도 흐른 세월만큼 변하기 마련이어서 그 맥을 같이한다. 자연을 즐기는 토속적 문화와 그 속에서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서구문화가 결합된 송호관광지는 그래서 더욱 매력이 있다.
86,000평의 부지에 조성된 송호관광지는 관리사무소를 비롯하여 주차장, 샤워장, 취사장, 체력단련장, 어린이 놀이터, 산책로, 방갈로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 보다 즐겁고 쾌적한 휴식공간과 놀이공간을 제공코자 송호 물놀이장을 최신식 공법과 시설을 도입하여 건립하였다.
물놀이장에는 유아풀, 성인풀, 유수풀, 높이 2m 길이 13m의 어린이 슬라이드풀, 높이 6m 길이 43m의 청소년 및 성인용 슬라이드풀, 모래 찜질장 등의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으며 분수대, 장미꽃 터널, 살구꽃 동산, 특산물을 형상화한 조각공원 등 송호관광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금강 상류의 맑은 물과 송림이 어우러져 산림욕과 더불어 가족단위 및 청소년 심신수련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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