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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2년(1885)에 지은 집이다. 넓은 들 위에 자리잡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광채 등이 있었으나,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대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이 멀찌감치 떨어져 남아있고 넓은 들 위에 자리잡아 편안하고 안정된모습을 지닌다.
지정 당시 명칭은 영동송재문가옥이었으나 2007.1.29 ‘영동 소석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
충청의 젖줄 금강이 흐르고, 영동군의 동부와 북부를 적시며 흐르는 초강천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곳. 그 언저리 드넓고 비옥한 평지가 발달하여 일찍이 옥답의 풍요가 넘실되는 약속의 땅 초강리(草江里)는 수량이 풍부하고 평지가 발달한 자연적 여건 속에서 심천면의 중심지 심천리와 함께 번성했던 고장이다. 그리고 심천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초강리는 경부선철도와 4번국도가 지나고 505번 지방도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며, 심천중학교와 초강초등학교가 위치하여 심천면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다.
이 마을을 가자면 옥천에서 영동방면으로 4번국도를 따라 가다 금강을 가로지르는 고당교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를 건너서 약 1.1km 전방 약목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4번국도를 벗어나고 505번 지방도로 진입한다. 진입 후 505번 지방도를 따라 심천역 방면으로 길을 잡고 다리를 건너면 초강리에 들어선 셈이다.
조그만 언덕하나 없이 평지에 조성된 이 마을 어디쯤에 있다는 전통문화유산 송재문 가옥(宋在文 家屋)을 찾아가는 길. 길 주변에 식당과 상가가 위치하고 마을한가운데 초등학교까지 위치하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심천면 소재지로 착각할 정도로 마을이 발달돼 있다. 비옥한 토지에서 논밭일구며 논농사와 밭농사는 물론이고 특용작물 재배도 성행한다니 부자마을이 따로 없다. 예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이 마을에 갖출 격식 다 갖춘 부농의 집이 있다니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부농의 집으로 이름난 소석고택 가는 길은 초강초등학교 정문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 학교 담과 주택가 사이의 골목길로 접어들어 골목 끝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선 다음 2번째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골목 끝에 소석고택에 다다르게 된다. 자동차로 답사를 한다면 학교 인근에 주차를 하고 도보로 답사할 것을 권한다. 마을안길이 좁아서 운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뿐더러 주차공간 또한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자동차로 최대한 접근하여 답사를 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자면, 마을 다리를 건너서 505번지방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난 둑길을 따라 가면 쉽고도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둑길의 초입에서 목적지까지는 950m 전방 과수원 가장자리에 물탱크 같은 콘크리트구조물이 세워져 있는 곳에 이르면 북동쪽으로 가옥의 지붕이 보인다.
송재문가옥은 H자형의 특이한 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연도가 새겨진 기명와(記銘瓦)에 의해 건축연대 추정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는 건물이다. 과수원 너머 먼발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소석고택의 멋스런 지붕은 그 너머 야산하나 없이 허공이 배경이어서 그런지 고고하며 단아한 운치가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전통건축물의 특징 중 지붕의 선이 아름답고 자연미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 한다. 동아줄을 살짝 늘어뜨린 듯 자연스러운 곡선이 살아나는 용마루하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면서 끝을 살짝 치켜 올린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의 맵시는 여인네 버선코의 아름다움에 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자연미가 살아나는 우리나라 건축물의 지붕 선은 주변국가 중 중국과 일본 건축물만 보아도 확연한 차이가 난다. 중국 건축물의 용마루는 곡선을 살렸으나 그 양쪽 끝을 과장되게 치켜 올려 자연미가 떨어지며, 일본 건축물의 용마루는 수평이어서 변화의 미가 없다.
이처럼 유순한 선의 아름다움이 있는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지붕은 종류도 많다.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ㄱ자집지붕, ㄷ자집지붕, 사모지붕, ‘T’자지붕, ‘十’자지붕 등 건물의 쓰임새나 규모에 따라 지붕의 모양도 가지가지이다. 열거한 바와 같은 지붕 외에도 종류가 다양한데 H자 지붕 또한 보기 드문 우리나라 전통 지붕의 형태이다.
소석고택은 언급했듯이 H자형의 특이한 지붕을 하고 있다. ‘ㄷ’자 집에서 양 날개의 뒤로 반칸씩 연장하여 건물을 구조하였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지붕이 되었다. 이 가옥의 사랑채를 보노라면 H자형 집의 생김새와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등의 특징을 한곳에서 관찰하며 감상할 수 있다.
우선 서쪽의 날개에 해당하는 건물을 보면 우진각 지붕으로 지어져 있는데, 이 지붕의 특징은 용마루와 추녀마루만 있고 내림마루는 없으며, 건물의 정면에서 지붕을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형태이고 옆면에서 보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동쪽날개에 해당하는 건물을 보면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는데, 이 지붕의 특징은 우진각지붕 위에 맞배지붕을 얹어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옆면에서 보면 삼각형의 우진각지붕을 3분의 1정도 모서리 부분을 잘라내고 잘라낸 만큼 맞배지붕의 박공을 얹어 놓은 듯 한 모양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맞배지붕이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지붕을 말하고 사람인人자의 형태는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의 밑 부분에 걸리는 판재를 말하는데 이를 두고 박공이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집을 지을 때 풍수지리에 입각해 집을 짓기도 하였지만, 주변풍광 또한 빼놓지 않고 살피며 집을 지었다. 상류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김선조 가옥의 사랑채는 멋스러운 누마루가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올라 앉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누마루는 누각이나 정자를 평소 생활하는 공간인 집안으로 들인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정자와 누각은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트인 곳에 지어놓고 자연을 감상하고 풍류를 즐기던 선조들의 멋이 깃든 건축물이다. 누각이나 정자는 평소 자연을 감상하며 술과 음식을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면서 자연을 즐기며 정신수양을 하기도 하는 공간으로 멋을 아는 선조들에 의해 애용되어져 왔다.
이렇게 누각이나 정자를 닮은 누마루는 보통 더운 계절에 바깥 바람을 온전히 받아 시원함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기능적 공간이다. 이 누마루는 누마루를 중심으로 아래와 위 앞과 양옆의 면 등에 벽을 대지 않고 기둥만 세워 삼면이 트인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허공에 마루를 깔아놓은 셈이다. 누마루는 보통 바닥과 마루사이를 높게 하여 공간을 두기 때문에 낙성의 위험이 있게 마련이어서 3면에 난간을 두른다. 난간 또한 멋을 내어 여러 가지로 분류되는데 이 누마루의 난간은 평난간으로 단순히 살대를 끼워 난간의 기능성만 살리고 다른 꾸밈은 없다. 다만 누마루 앞면의 난간에 난간대와 하엽 그리고 하엽과 연결되는 살대만 놓아 난간대를 지지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통난간의 형식은 따랐으나 장식적 구조는 생략했다.
평소 남성의 생활공간이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 사랑채의 누마루는 글을 읽거나 자연을 벗 삼아 명상을 즐기는 공간이기도하면서 손님맞이를 하면서 술이나 음식, 또는 차를 나누는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무더운 여름. 누마루에 올라 앉아 책 읽는 선비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것은 자연을 벗 삼으며 학문연마와 정신수양 하기를 즐기는 우리선조들의 멋이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마루가 있는 동쪽날개는 반칸을 뒤로 빼서 골방을 들이고, 나머지 두칸은 아래 위 건넌방을 들였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눈마루에 접하는 건넌방의 창호이다. 창호란 “건물에 쓰이는 모든 문과 창”을 일컫는다는 것을 일단 알아두고 보자. 동쪽날개에 들인 건넌방의 출입문은 대청으로 나 있으며 누마루와 툇마루 쪽으로 창을 낸 것을 볼 수 있는데, 형태로 보아 창과 문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창을 보고 문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이런 경우 창호 아랫부분에 머름을 대고 안 대고에 따라서 문과 창을 구별하는 요소가 된다. 창문은 창문 밑에 출입문의 문지방과는 달리 높이를 높인 머름을 대는데, 방안에 앉아 팔을 걸쳤을 때 가장 편안한 높이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또 머름은 그 높이에 의해 외부와 내부공간을 분리시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장의 기능도 하게 되는데 사극을 보면 양반이 창에 기대어 하인을 부리는 장면을 연상하면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이 방의 창은 내부에 들어가 앉아보면 알 수 있듯이 주위의 경관을 안으로 들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한옥의 창이나 정자를 통해서 주변풍광을 보노라면 의도된 프레임으로 나누어진 멋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는 소견을 밝히기도 하였는데, 사실 대지에 건물을 들이고 창을 낼 때는 지형지세는 물론이고 전망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건물의 위치와 방향이 정해진다. 이처럼 전통 건축의 창은 자연적 풍광을 건물 내부에서 즐길 줄 아는 선조들의 멋과 풍류가 지혜롭게 녹아든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석고택의 사랑 건넌방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광은 건물 주변이 드넓은 평지이면서 주택가여서 그런지 그리 감동적이지 못하지만 마을 너머 남쪽으로 성산이, 남서쪽으로 국사봉이 널따란 하늘을 머금은 채 아련하여 시원한 맛이 있다.
넓은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광채만 남아 있는 소석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안채와 사랑채사이는 현재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동쪽 담 옆에 광채가 서향으로 지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성위제가옥의 광채와 이 가옥의 광채 짓기의 수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성위제 가옥의 광채는 빈지널을 세로로 끼워 벽을 마감하면서 4면의 벽 중 앞면은 대문과 큼지막한 빈지널로 마감하고 나버지 벽의 3면에 각 칸마다 중인방으로 면을 나눈 다음 빈지널을 촘촘히 끼워 마감하였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석고택의 광채는 성위제가옥의 뒤주 벽채처럼 가로로 빈지널을 끼워 맞추고 있어 성위제가옥의 광채와 대조를 이룬다. 이 광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의 규모이며, 각 칸마다 세로로 중인방을 넣고 빈지널을 가로로 끼워 벽을 견고하게 계획한 점이 특이하다. 건축연대는 20세기 초로 알려져 있지만, 전통적 방식에 따른 빈지널의 광채로 지어진 점이 돋보이는 이 광채는 바닥은 널마루로 깔고 천장 또한 널판자로 마감 하였으며 초가지붕을 하고 있어서 더욱 고풍스럽다.
넓은 대지 한켠에 오도카니 서있는 광채는 그 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특이하다. 출입문칸에 중인방 두 개를 세로로 놓고 양옆은 영구히 막고 가운데는 빈지널을 빼고 끼울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이것이 광채인지 뒤주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아무튼 현재 광채로 쓰고 있고, 학술조사 결과도 광채로 표기하고 있으니 광채가 맞기는 한듯하다. 이러한 시설은 우리나라 중남부 내륙 지방에서 가끔 보이는 농가의 경영시설 중 하나로 보고되고 있다.
본 글은 소석고택의 특정적인부분을 중심으로 소개하였기 때문에 전체 건물을 소개하지 못했다. 이 글(소석고택에 대하여)을 포함하여 성위제 가옥, 규당 고택, 김참판 가옥 등의 답사기를 모두 읽고 지식을 쌓는다면, 달리 설명을 하지 않아도 소개되지 않은 건축물에 대한 이해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답사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소석고택에 게시되고 있는 문화재 안내판의 내용과 함께 찾아가는 길을 약도와 함께 제공하였다.
포토갤러리
지도
영동교사거리에서 옥천방면으로 4번국도타고 직진 6.8km 진행 → 약목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05번 지방도 진입 0.56km 진행 → 초강리입구삼거리에서 좌회전 0.35km 진행 → 다리건너 초강리삼거리에서 좌회전 둑길 진입 0.95km 진행 → 과수원 콘크리트구조물 주변 주차 → 과수원 너머로 보이는 기와지붕을 향해 과수원 길을 가로질러 외쪽으로 돌아서면 목적지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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