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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창은 조선후기의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조선 순조(재위 1800∼1834) 때 간행된 『유예지(遊藝志)』에 처음으로 경제(京制)에 해당하는 평시조 악보가 전한다. 그 후 가곡의 영향으로 많은 시조곡조가 파생되었고, 시조창이 각 지방으로 널리 보급됨에 따라 지역적 특성을 띠게 되는데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경제(京制), 전라도의 완제(完制), 충청도의 내포제(內浦制), 경상도의 영제(嶺制) 등으로 구분되었다. 내포제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서 시작된 시조창으로서 충청지역의 고유한 음악이다. 한우섭(韓..
2013. 7. 10일경 화재로 목조여래좌상이 전소되어 도지정문화재 지정이 2013. 11. 8일 해제되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중화사는 1960년에 간행된 『영동군지』에 의하면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에 보각국사가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서산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유재란(1597년) 당시 소실되었던 것을 숙종 3년(1677)에 대웅전 등을 중수하였고, 정조 21년(1797)에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순종 융희 2년(1908)에 다시 중창하였으며 일제강..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한다. 이 녹권은 태종이 잠저(潛邸,동궁)에 있을 때 밤낮으로 보좌한 신하들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포상하고 수여한 원종공신록권으로, 태종 11년(1411) 11월에 당시 통훈대부판사재감사였던 이형에게 발급한 3등공신록권이다. 크기는 가로 243㎝, 세로 34.7㎝이며, 종이질은 닥나무종이이다. 태조 이성계가 봉한 원종공신 이후 두 번째로 발급된 녹권으로, 조선 전기 공신에 대한 대우와 공신록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현재 서울 국립중앙..
중앙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문수(文殊)·보현(普賢) 등 보살(菩薩)과 성중(聖衆)들을 빽빽하게 배치하였으며, 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비교적 제작시기가 이르다. 이 그림은 인문 일파가 주도하여 그린 전형적인 군도형식(群圖形式)의 작품으로 본존을 에워싸도록 주위를 빙 둘러 권속들을 배치하였으며, 상단에는 부드러운 중간 색조의 황·녹·홍색의 색구름을 둔 뒤 나머지 여백을 짙게 처리하여 공간감을 부여하였다. 또한 주변 인물들의 크기를 위로 갈수록 작게 그리고 모두 본존불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평면의 화면에 ..
모의당은 회봉공(晦峰公) 배후도(裵後度)의 후손들이 1725년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의 학업의 장으로 돈화재(敦話齋)라는 강당을 지었으며, 1815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1852년 모의(慕義)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856년에 모의당(慕義堂)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건물 구조는 전면 4칸반, 측면 2칸의 팔작 홑처마 기와지붕이며, 주초석은 자연석 덤벙 주초석이다. 내부구조는 1고주 5량집이며 중앙에 대청마루, 오른쪽은 루마루방이 있고, 왼쪽은 2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의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교장의 ..
박사삼(朴事三)은 17세기 중엽의 인물로 호는 안정(安定), 자(字)는 여일(如一)본관은 충주이다. 일찍이 산수를 좋아하여 지금의 김천시 대항면에 이주했을 때 옥천에 있는 중봉 조헌 선생과 성리학을 강론 하다가 선생의 동서가 되었다. 그는 효행이 출천(出天)하여 효종 7년(1656년)에 장사랑사옹원참봉(將仕郞司甕院參奉)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그의 사후에 세운 묘표는 현종 10년(1669년)에 박사삼의 아들 일석(一石) 박유동(朴惟東)의 청으로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저술했고, 비문 글씨는 그의 손자 헌장이 써서 입석했..
2013. 7. 10일경 화재로 대웅전이 전소되어 도지정문화재 지정이 2013. 9. 13일 해제되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중화사 대웅전은 신라 진평왕(582년)때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1352년)때 보각국존(普覺國尊)이 중창하였다고 전해지나
이것은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기 이전의 일로 당시에 건립된 사찰의
위치는 정확히 알수가 없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창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순종(1908년)때 백의선사(白衣禪師)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건물구조는 ..
영동군 향토유적 제 61 호 학촌 박이룡 장군(1533∼1595)은 충주인으로, 1533년에 출생하여 선조 10년(1577) 승문원정자로 처음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 하였으며, 해서(현재 황해도) 순찰사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스스로 황의장이 되어 15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이곳 괘방령을 근거지로 삼아 김천, 지례, 개령, 선산 등지에서 200여 회에 걸쳐 수많은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능성현령(전라도 화순)을 제수 받았고 1595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봉해졌으나,..
영동군 향토유적 제 60 호 서병두의 호는 농은, 본관(本貫)은 부여인(扶餘人)이며 19세기 중엽의 인물이다. 그는 대원군의 자손(子孫)으로 효행이 지극했다 하는데 자세한 효행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가 죽은 후 고종 35년(1898)에 효행을 기려 정려문을 세웠고, 동몽교관(童蒙校官)에 증직(贈職) 되었다. 정려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 기와집이다. ※ 정 려 문 : 충신, 효자, 열려 등을 위하여 세운 문 ※ 동몽교관 : 조선 초 어린이 교육을 위해 각 군현(郡縣)에 두었던 관직, 현재의 초등학교 교..
영동군 향토유적 제 59 호 하동정씨는 여흥민씨 민보광의 아내로 남편이 죽자 3년간 시묘(侍墓)하고 4계절 의복을 묘 앞에 태웠으며, 탈상하자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평생 계속 하였다. 성종 2년에 명정 되었고, 정문은 영조 40년(1764)에 건립되었으며 1954년 이곳으로 비를 옮기고 정문을 중건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 둥근기둥의 맞배 기와집이다. ※ 시 묘 : 부모 거상중 그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일 ※ 상 식 : 상가에서 아침 저녁으로 염좌에 드리는 음식 ※ 명 정 : 다홍 바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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