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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향토유적 제 58 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배흥당(1685-1745)과 그의 차남 배진호(1719-1769)의 효행을 기려 철종 5년(1854)에 명정(命旌)되어 세워진 정려이나, 자세한 효행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은 목조기와 1칸의 맞배집이다. ※ 첨지중추부사 : 조선때 중추부(왕명출납, 군기를 맡던 관아) 정삼품 벼슬 ※ 정 려 : 충신, 효자, 열려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함 ※ 명 정 :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기
영동군 향토유적 제 57 호 이 정문은 김한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 17년(1741)에 건립하였다. 그는 부친을 일찍이 여의고 모친을 모시던 중,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돌아가실 때까지 10여년간 대소변을 손수 받아냈다. 또한 약을 구하고자 험하고 깊은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어 손수 달여 병 구환을 하였다. 이 건물은 목조기와 1칸의 맞배집이다. ※ 정 문 : 충신, 효자, 열려 등을 표창코자 그 집 앞에 세우는 붉은 문
영동군 향토유적 제 56 호 양씨는 경주정씨 양경공파 후손인 정세환과 혼인하여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자식과 시부모를 모시던 중, 시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손가락과 허벅지를 칼로 베어 피를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여 그 효열(孝烈)을 기리기 위하여 1930년 경주정씨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 55 호 이 정문은 민대혁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 29년(1892)에 건립하였고 1924년에 개축하였다. 그는 본관이 여흥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그물을 만들어 어부에게 주어 5일에 생선 2마리를 바치게 하고, 푸줏간에 돈을주어 10일에 고기 5근을 바치게 하여 부친을 봉양하였다. 그러던 중 부친의 발에 종기가 나자 백약이 무효였으나 쇠비름이 좋다는 말을 듣고 겨울인데도 울타리 밑에서 쇠비름을 개어 생즙을 내서 발라 종기를 낫게 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고종 29년(1892) 10월에..
영동군 향토유적 제 54 호 오촌 박응훈(梧村 朴應勳, 1539∼1590)은 임진왜란시 의병장인 박이룡 장군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다. 부모상을 당하여 장지를 구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묘소를 정해 주었으므로 이를 호점산소(虎占山所)라 하며, 묘소는 황간면 소계리 안산에 있다.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공을 지켜 주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 34년(1601년)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현종때 송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옆의 열려문은 통덕랑(通..
영동군 향토유적 제 53 호 매한손(梅漢孫)은 조선초의 사람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선조(先祖)는 원래 중국사람으로 고려말 우리나라로 귀화하여 이곳 황간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그 이후부터 자손들이 이곳 매곡면 노천리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매한손은 원래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공손하며, 품행이 바른 사람으로 부친이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병을 낫게 하였으며, 추운 겨울에 강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병석의 부친을 받들어 모셨다. 중종 14년(1519년) 매한손의 효성을 전해들은..
영동군 향토유적 제 52 호 민경호는 여흥( 興)인으로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끊어져 가는 목숨을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모친의 병환이 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또한 돌아가신 후에도 6년간을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죽을 먹으면서 부모님에 대한 예를 지켰다. 숙종 42년(1716)에 정문을 명 받았고,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에 증직(贈職) 되었다. 건물은 1칸, 목조기와 맞배 집이다. ※ 정 문 : 충신, 효자, 열려 등을 표창하고자 그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문 ※ 한성부 좌윤 ..
영동군 향토유적 제 51 호 이 정문(旌門)은 이의정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의정은 본관(本貫)이 여주 하음(河陰)으로 고려후기 이규보의 팔대손이고 , 이조판서 장(墻)의 손이며, 율곡 이이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보령현감에 재직할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최경희 장군과 더불어 진주성 싸움에서 투신 순절 하였으며, 경종 2년(1722)에 명정(命旌) 되었다. 건물은 1칸,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 정 문 : 충신, 효자, 열려 등을 표창하고자 그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
영동군 향토유적 제 50 호 이 정문은 여하현(呂夏鉉)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13년 마을 사람들이 길을 닦고 정문을 세워 그 안에 비를 세웠다. 그는 본관이 함양, 자는 우필(禹弼), 호는 금사(錦史)이다. 그는 부친이 병을 얻자 온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6년간 매일같이 성묘하면서 슬픔을 달래는 등 효심이 지극했다. 건물은 1칸, 목조기와 맞배집이다. ※ 정 문 : 충신, 효자, 열려 등을 표창하고자 그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문
영동군 향토유적 제 49 호 열부(烈婦)인 정씨는 하동(河東) 사람이고 민보광(閔普光)의 아내이다. 정씨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온화함으로 남편을 섬기었다. 남편 사후 삼년 동안 죽을 마시고, 세수도 안하고, 머리도 안 빗고, 묘 옆에 움막을 짓고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혼백(魂魄)을 붙들고 슬피 울었다 한다. 그의 열행이 뛰어나 성종 2년(1471)에 정려(旌閭) 되었고, 이 정문(旌門)은 영조 40년(1764)에 건립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 둥근기둥 맞배 목조 기와집이다. ※ 정 려 : 충신,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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