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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향토유적 제 10, 11 호 좌측 1기는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원통에 가까운 석종형(石鐘形)으로 된 탑신을 지대석과 팔각의 대석이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다. 우측 2기 또한 화강석으로 석종형(石鐘形)이며,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받침돌을 이중으로 얹어 그 위에 종형의 탑신석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원반형의 옥개석을 올려 놓았다. 2기 모두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잃고 있으며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부 도 : 스님이나 불자가 죽은 뒤에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돌..
영동군 향토유적 제 8호 1989년 10월 1일 지하에 매몰된 5층 석탑의 옥개석(屋蓋石) 발굴로 귀중한 탑파의 연구 자료로 그 빛을 더하게 될 지 자못 기대되는 탑이다. 모형으로 보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보이며, 옛날 이곳은 풍곡사(豊谷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 배불숭유 정책에 따라 유교의 보급과 치도(治道)의 이념 확대를 위해서 많은 사찰을 폐하여 향교나 유학 진흥에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 곳에 자풍서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측된다. ※ 옥 개 석 : 옥..
영동군 향토유적 제 26 호 당초 비봉산(飛鳳山) 이리사지(숭추골)에 있던 것을 해방후 양산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아 보존하고 있다. 이것은 지대석(地臺石)과 상륜(相輪)부분이 없고 다만 지대석 제2기단 1개의 돌만 있으며, 탑신이 거의 없고 옥개석(屋蓋石)도 거의 파손 되었다.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전체 높이 2.4m, 폭이 1m 이다. ※ 비봉산 : 학산 박계리 상지마을 윗산(481m) 지대석 : 탑을 세우기 위해 땅위에 터를 잡고 올려 놓은 돌 탑 신 : 탑의 주체, 몸체 옥개석 : 탑신석..
영동군 향토유적 제 22 호 밀양박씨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천귀(朴天貴)는 대제학 박시용(朴時庸)의 둘째 아들이다. 10세에 아버님이 별세하자 형(兄) 박천석(朴天錫)이 관직에 있었음으로 홀로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게 되었다. 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친분이 있던 관계로 태종이 즉위한 뒤 옛정을 생각하여 한성판윤의 왕지를 써 주시고 관직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당시 선비의 고결한 기풍을 꺾지 않고 병을 핑계로 인천강산(仁川江山)에서 낚시로 여생을 마쳤다. 그 후 후손들이 어서각을 짓고 왕지(王旨)를 탁본하여 현재까..
영동군 향토유적 제 16 호 조선 현종 7년(1666년) 창건된 서원으로 매계 조위(梅溪 曺偉), 송당 박영(松堂 朴英), 남정 김시창(嵐亭 金始昌), 오촌 박응훈(梧村 朴應勳)등 四先生을 봉안 하였으며, 봉안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 숙종말 삼괴당 남지언(三槐堂 南知言), 일석 박유동(一石 朴惟棟) 二先生을 추향(追享)하여 이를 송계 육선생(松溪 六先生)이라 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毁撤) 되었으나, 광무 2년(1898)에 지방 유림들이 유계를 창설하여 매년 음력 3월 보름날 육선생의 위..
영동군 향토유적 제 21 호 쌍효각은 국당 박흥생과 이요당 박흥거의 효자비로서 1684년 화암서원 건립당시 호서유림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조정의 윤허(允許)로 건립된 것인데, 난계 박연 효자각을 1973년 밀양박씨 종중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여 삼효각(三孝閣)이 됐다. 둥근기둥 목조기와로서 정면 2칸, 맞배집이다. ※ 윤 허 : 임금이 허가함
영동군 향토유적 제 18 호 고종 8년(1871년)에 밀양박씨 복야공파(僕射公派)의 조상 6위를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 하였으나, 6·25 동란으로 낡아 무너진 것을 1974년 다시 고쳐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안치된 위(位)는 고려조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 문간공 (文簡公) 박시용(朴時庸), 증이판(贈吏判) 박천석(朴天錫),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천귀(朴天貴), 증이판(贈吏判) 국당공(菊堂公) 박흥생(朴興生),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박연(朴堧), 전중어사(殿中御史) 박흥거(朴興居)등..
규모 : 3칸 맞배집 수량 : 1동 관리자 : 김면수 영동향교내 대성전 서쪽에 위치하며 태종 15년(1415)에 노흥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고 학문을 일어나게 하였으나 향교가 피폐하고 관리할 사람이 없어 고민한 나머지 노수령이 사재를 희사하여 관리토록 하였다. 그의 성인을 존경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공로를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 목조기와로 정면 2칸의 맞배집이다. 매년 석전제를 봄, 가을에 지내후 그 달 둘째번의 丁日에 제사를 지낸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 30 호 조선초 문신 정수충(鄭守忠)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출생, 예종 원년(1469년)에 사망 했으며, 자는 경부(敬夫), 본관은 하동(河東), 호는 고송재(孤松齋),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공은 재덕을 겸비한 인사로서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부가 되었다. 이어 1463년에 대사성이 되고 좌찬성에 이르렀다. 항상 인(仁)을 숭상하고 청빈한 생활로서 빈곤한 자를 친척같이 대접하며, 그 교훈과 덕화가 주위 일대에 알려졌다. 공을 추모하기 위하..
금강(錦江) 기슭의 기암절벽(奇岩節壁)과 노송(老松)이 울창한 곳으로 대(臺)밑을 감돌아 흐르는 맑은 강물과 멀리 퍼진 넓은 들의 경관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神仙)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강선대라 하였으며,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훌륭한 시가 있다. 1956년 5월 10일 여씨 문중에서 6각정을 건립 하였는데, 둥근 기둥에 시멘트 6각 기와집으로 6.6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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