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와 문화가 함께하는 관광도시 영동으로 떠나보세요
고려 말 전객령(典客令) 영산김씨 김영이(金令貽)가 맏사위인 순천박씨 정랑(正郞) 박원용(朴元龍), 둘째사위 구례장씨 한성판윤(漢城判尹) 장비(張丕), 셋째사위 밀양박씨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갈건야복으로 학문을 강론하며, 후진양성에 노력하여 덕행과 미풍양속을 심어주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추모하여 옥정이라 하였으며, 빙옥정의 이름은 얼음과 같이 맑고 구슬과 같이 윤이 난다는 뜻으로 이름짓게 되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 지붕의 목조기와집..
세심정은 조선 중종조에 삼괴당 남지언 선생이 기묘사화에 시국을 비관하고 일생을 은거하며, 성심껏 수도하고 덕행을 친히 숭상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과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아는 선비 생활을 하면서 세운 정자이다.학문과 덕을 숭상하고 도리를 배우는데 일생을 바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사는 선비들의 뛰어난 행실과 높은 절개를 본받아 이어가라는 의미에서 세심정이라 하였다.기초 암벽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음각 글귀가 있어 선생의 덕행을 나타내고 있으며, 후면 바위에는 고성남씨 세거지 라는 음각의 글씨..
구 황간현의 아문루(衙門樓)인 황악루(黃嶽樓)가 퇴락하여 1925년에 영동군수 최지환(崔志煥)이 당시의 지방유지와 협의하여 군(郡) 소재지인 영동읍 매천리로 이전, 신축하고 읍청루라 편액 하였다.이는 매천의 맑은 기운을 따서 이름한 것이라 하며, 이때 비용은 이당 손재하(二堂 孫在夏) 선생이 100원을 희사하여 이루어졌다.그 후 1971년 임혁재(任赫宰) 군수가 다시 매천리 용두산 중간봉으로 이전하였으며, 6·25때 없어진 현판은 1971년 효연 이철순씨가 다시 썼다.이 누각의 규모는 청색기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 지붕의..
조선시대 읍청( 淸) 박사종(朴嗣宗)이 호호정(浩浩亭)을 약목리 장승산(長承山)에 지어 일명 마산정(馬山亭)이라고도 하였다.이후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밀양박씨 종중에서 1959년 이곳에 다시 짓고, 호서루로 이름을 바꿨으며, 금탄(錦灘) 박시호(朴時浩)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둥근기둥의 목조기와 2층 누각으로 99.2㎡(30평)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 호 호(浩浩) : 넓고 큰 모양 기 문(記文) : 기록한 글
영동·옥천 이남 하천의 근원이 양강을 이루어 한 호수를 뚫고 금강으로 흘렀으니, 이 호수를 금호(錦湖)라 불렀고 또 8경을 이루고 있다. 이 호수 위에는 옛날 환선루(喚仙樓)가 있었는데 큰물에 허물어져 버렸다. 그 후 이 고장의 선비 37명이 1938년 봄에 전북 무주에 있던 한풍루(寒風樓)를 옮겨다가 옛터 옆에 세웠으나, 1971년 무주의 반환요구에 따라 한풍루를 반환하고, 현 위치에 다시 지어 금호루라 이름하였다. 32.4㎡ 규모로 정면 3칸의 둥근기둥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이 재실(齋室)은 조선 숙종(肅宗) 16년(1691)에 충주박씨 문중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동시에 후손들이 학문을 배우고 탐구하는 곳으로 사용 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다. 후에는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성하식(成夏植) 선생이 이곳에서 훈장을 하시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 하였다. 광복 후에는 독립운동가이며,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선생이 이곳에서 황간·매곡·상촌 지역의 유림(儒林)들을 모아 시국강연 (時局講演)을 한 곳으로 전해 온다. 세천재는 전형적인 재실 건물로서..
이 곳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일컫는 아름다운 절경을 음미하면서 서재(書齋)를 짓고 글을 가르치던 곳으로 한천팔경은 사군봉(使君峰), 월류봉(月留峰), 산양벽(山羊壁), 용연대(龍淵臺), 화헌악(花軒嶽), 청학굴(淸鶴窟), 법존암(法存庵), 냉천정(冷泉亭)으로 이름 붙여진 그 모양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후세에 우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글을 가르치는 한천서원(寒泉書院)이 세워졌다가 고종 초에 철폐된 후 유림들이 1910년 한천정사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건축..
이곳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의정(1555∼1593) 장군의 유적지이다.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및 충신각이 있다.묘소는 그가 살던 옛집 뒷산에 있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옷과 신발만이 묻혀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신도비는 송환기(宋煥箕)가 글을 지어 순조 원년(1801)에 묘 앞에 세웠다. 충신각은 경종 2년(1722)에 명정(命旌)되어 세운 것으로 묘소로부터 남서쪽의 산기슭에 있다.묘역 앞에는 1996년에 세운 사당으로 충의사(忠義祠)가 있다.이의정은 본관이 황려로 이규보(李圭報)의 8대 손이다.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이 상여는 1909년 고종 황제가 6촌형인 이용직(초명은 이용강) 대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하사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 왕가의 상여이다.보통 상여와는 달리 대차·소차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대차는 36명, 소차는 24명이 메도록 되어 있어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외부장식이 섬세하고 다채롭다.대차의 총 길이는 10m이고 둘레 47cm이며, 교자판(칠성판)이 있어 칠성판(가로 1.2m, 고리 8개)에 고정시킬 수 있다.장식은 용머리가 앞뒤로 2개씩 4개, 봉(鳳:수컷)이 앞뒤 2개씩 4개, 황(凰:암컷)이 앞뒤로 1개씩 2개, 동..
이 신당은 원래 상촌면 고자리 산중에 있었으나, 영동 군수의 꿈에 관우 장군이 나타나 신당을 당곡리로 이전해 줄 것을 원하여 마을사람들이 이 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마을에서는 이 신당을 수호신으로 삼아, 매년 정월 14일에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고 병과 재해와 악귀를 쫓는 제사를 관성제군에게 올리고 있는데, 중국의 관왕묘 신앙과 한국 동제의 말 신앙이 복합된 형태이다. 제사 비용은 마을 소유의 위전(位田:소출을 제사 등 일정 목적에 쓰기 위하여 장만한 전답) 600평에서 충당한다.관우 사당 또는 관용묘라 부르는 이 신당은 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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