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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동군에서 꼬박 하루를 유적 답사로 보냈습니다. 우리 일행은 부산교육대 사회교육원 고전강독반 주관으로 모두 38명이 함께 했습니다. 이전에는 거저 영동 포도 정도로만 알았는데, 우암 선생, 난계 박연 등 의외로 많은 문화유적과 빼어난 자연 풍광에 대해 새롭게 알았답니다. 먼저 이날 안내를 맡아 수고해 주신 이원철 문화관광해설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이 분은 얼마나 영동을 사랑하고, 영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지 우리 일행은 내심 많이 놀랐습니다. 아래에 영동군 문화유적을 둘러본 소감을 적어봅니다.
첫째, 6.25 전쟁의 비극, 노근리에 대한 적절한 해설은 어느 정도일까요?
상세한 해설을 듣고 난 뒤, 노근리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부분 바뀌었습니다. 말인즉슨, 이 사건은 미군 주도의 연합군 측이 오해나 실수로 촉발된 참사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이뤄진 학살이란 점입니다. 즉, 연합군 측이 개전 초반의 연패를 만회하고자 고의로 승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6.25 전쟁에 대한 입체적인 시각이 뿌옇게 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테면, 6.25 전쟁 동안 연합군 측 사망자도 거의 4만 명이었던 사실입니다. 그들 역시 20대 전후 꽃다운 젊은이들이, 아무런 빚진 것도 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 와서 숨져간 사실 말입니다. 지난해 6월6일, 현충일에 유엔묘지에 가서 스스로 자문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들의 희생에 대해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노근리의 억울한 희생을 강조하다 보면, 연합군 측의 안타까운 희생자들까지 도매금으로 가해자로 오인될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 우암 선생의 한천정사(寒泉亭舍)에서 느낀 부끄러움입니다.
강과 산이 한데 어우러진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서 밤하늘의 달도 머물러 간다는 월류정(月留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정말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 한천정사를 보고 일순간에 황당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일행 중에는 부산교육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외국인 학생 8명도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한천정사에 들렀더니,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있었습니다. 설상가상 대청마루의 마루널 한 장이 부서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재 자랑을 한답시고 외국인 학생들까지 데려갔는데 부서진 마루 널을 본 순간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릅니다. 제발 빠른 시일 내에 보수를 하고, 평소에 유지관리를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천년 고찰 가는 길의 과도한 걸개 시편(詩篇) 전시회입니다.
천태산 자락에 안긴 천년고찰 영국사를 찾아가는 길, 그 시작은 감동이었습니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정성들여 만든 걸개 시편들 덕분입니다. 은행나무 가로수 사이마다 장방형 하얀 천 조각으로 만든 걸개 시편들이 열병식을 하듯이 길 양쪽으로 붙어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시편들 역시 범람하면 오히려 싫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홍수 나면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새봄을 맞아 천년 고찰로 오르는 길은 자연 풍광만으로 얼마나 감동일까요? 울긋불긋 진달래, 하얀 목련, 이팝나무 꽃들, 가지마다 새 주둥이처럼 솟는 새움들, 계곡에 흘러내리는 폭폭수 등등, 이들 모두가 새 봄의 공연에 출연하는 주인공들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연도에 끊임없이 이어진 하얀 플래카드들이 비탈진 오솔길에 까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붙어있어, 새봄의 공연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어느 일정 구간에 시 마당을 따로 만들어 엄선한 시편들만 전시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처럼 천년고찰로 오르는 오솔길은 제발 비워주셨으면 그 감동이 백 배 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티끌들에도 불구하고 영동군 답사는 정말 좋았습니다. 영동군은 더 이상 내륙의 오지가 아니라, 다시 찾아가 머물고 싶은 고장이 되었답니다. 끝으로 다시 한번 영동군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친절한 해설에 감사를 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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