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왕건(王建) 궁예(弓裔)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다툰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탄생에 얽힌 설화는 사실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경북 문경 가은면의 이야기다. 일연(一然)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견훤이 광주(光州)태생이라고 쓰여 있기는 하지만 그곳 문경 가은면에는 천마산 농바위 전설, 아차동의 전설, 가은면 갈전2리 아차마을의 전설 등, 견훤의 탄생과 관한 전설이 여러 가지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상주 가은현(加恩縣)태생이라고 기록되었듯이 견훤이 상주에서 출생한 것이 정설처럼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만 같은 이 곳 상촌땅에도 견훤의 탄생설화가 불과 얼마 전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고, 이런 설을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사실도 있기에 함께 적는다.
옛날 상촌땅 진들마을(현 유곡2리 진들)에 사는 한 양반 집에 혼기가 다찬 예쁜 규수가 살고 있었다. 이 처녀는 인물도 고왔지만 행실도 바르고 마음씨도 착해서 인근 마을 뭇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이 처녀는 어렸을적부터 오줌이 마려우면 집 동쪽 담 모퉁이에 있는 수채구멍(빗물이나 허드레 물을 받아내는 하수구)에 가서 오줌을 누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처녀는 집안에 있을때나 아니면 집밖에 마실을 나가서도 오줌이 마려우면 언제나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볼일을 보왔고, 이처럼 10여년을 하루 같이 한 장소에서만 소변을 본 그 처녀는 어느듯 철이 들어 의젓한 처녀가 될 무렵부터는 밤에만 그 곳에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처녀의 고운 얼굴에는 까닭 모를 수심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처녀의 부모는 처음에는 예사로 알고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 여겼으나 날이 갈수록 딸의 얼굴에 병색이 짙어지자 마침내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한 부모는 딸을 조용히 불러 놓고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처녀는 결심을 한 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왠 낮모르는 총각이 밤마다 제 방에 놀러와서 새벽에 돌아가곤 했는데 도저히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사모하게 되어 결국 동침까지 하였으며 그런 일이 계속되자 배가 점점 불러와서 걱정이 되어 점점 불안해 지는 마음으로 잠도 못이루었습니다. 아버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며 자초지종을 고했다. 이런 딸의 고백을 듣고 난 부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되담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총각의 정체를 밝혀서 자기 딸과 혼인을 시키기로 결심한 부모는 궁리 끝에 딸에게 그 총각이 밤에 찾아 왔다가 새벽에 돌아갈 때, 바늘에 실을 꿰어 옷섶에 꽂아 두도록 당부를 했고, 처녀는 그날밤에도 어김없이 자기 방에 찾아온 총각이 옷에 바늘을 꽂아두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은 뒤 딸의 방 뒷문에서부터 뻗어 나와 서쪽으로 이어진 기와를 얹은 토담 위를 넘어간 실을 발견한 부모가 그 실을 따라가보자, 그 실은 마침 반쯤 무너진 토담너머 수북히 쌓여 있는 나뭇단 속으로 들어 가 있었다. 처녀의 부모는 급히 머슴을 불러 나뭇단을 허물도록 했다. 그리고 그 곳을 다 허물고 나니 땅 바닥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고, 실은 그 구멍속으로 들어가 깊은 굴속으로 이어져 있어서 머슴은 긴장하면서 그 실을 따라 굴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굴을 파들어 가다보니 마침내 그 끝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었으나 놀랍게도 그곳에는 커다란 뱀처럼 생긴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깜짝 놀란 머슴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끝까지 다 파헤치자 그 곳에는 뱀이 아닌 커다란 지렁이가 몸뚱이에 실꿰인 바늘이 꽂인 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지렁이는 죽고 말았으나 처녀의 배는 점점 불러오고 있었고, 그로부터 열달이 지나자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 났으니 이 아이가 곧 견훤(甄萱)이었던 것이다. 처녀의 부모는 이처럼 기막힌 일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고민 끝에 딸에게 약간의 땅을 떼어주며 아이와 함께 먼 곳으로 옮겨가 따로 살게 한 뒤, 이 사실을 황간의 원님께 낱낱이 고하며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성을 지어 주기를 간청했다. 원님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묘책이 떠 오른 듯, 무릎을 치며 실이 서쪽(西) 토담(土)의 기와(瓦)를 타고 넘었으니 성(姓)을 견(甄)으로 하라고 했고, 그 후 무럭무럭 자란 그 아이는 결국 영웅이 되어 마침내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생긴 성씨가 황간견씨(黃澗甄氏)라고 하며, 견훤을 때로는 진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지렁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말이 있어 견훤이 출생한 그곳을 진들(進坪)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다.(영동 향토연구, 2001. 11호 박우상, 송문영) 이처럼 견훤의 탄생에 얽힌 지렁이의 설화는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고, 바로 옆의 매곡면 내동(內洞, 안골)마을에도 견훤의 탄생설화가 있다고 하지만 상촌의 이야기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동에는 지금은 이 곳 주위에서 모두 자취를 감췄지만 조선 중엽까지 황간을 본관(本貫)으로 삼는 황간견씨(黃澗甄氏)가 거주했다는 사실이 이곳 지리지(地理志)인 黃溪誌 등에 기록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의 견훤탄생에 얽힌 전설을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는 것이다.(內洞, 在赤良之下, 古爲甄姓所居, 今爲朴姓所居..... 聽籟亭, 在梧谷川邊, 溪山淸奇, 縣人甄胤世亭也....) 사실 옛 황간현을 본관으로 삼는 토성(土姓,)인 황간견씨가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사연을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황간견씨 이후 내동에 터를 잡은 朴址(박지, 충주박씨)가 그곳에 오래전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參軍 甄季達(참군 견계달)의 무남독녀와 혼인, 贅居(췌거, 당시의 풍습으로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들어 처가살이 하는 것)하여 그 집 재산을 물려받아 후손이 번성했다는 충주박씨의 기록에서 그 사실을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