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본래 영동현 북북일면 풍천리 지역으로 구석에 있으므로 구촌(九村)이라 하였다. 1909년에는 영동군 북일면(北一面)에 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계땅, 골마, 대문안을 병합하여 구촌리라 하고 영동군 용산면에 편입하였다.
계땅은 구촌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고, 골마는 구촌 산골짜기에 발달한 마을이며, 대문안은 영산김씨 다섯 형제가 마을을 이룰 때 마을 입구에 큰 대문을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리는 구촌 1리(구촌리 : 골말)와 구촌 2리(구촌리)가 있으며 용산면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1963년에 이곳에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유물인 간돌검 1점과 화살촉 3점이 출토되어 국립 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황
- 가구수 : 342가구
- 인구수 : 559명 (남 295명, 여 264명)
(2023.3.25.기준)
특징
- 면소재지로 용산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 농업인 가구보다 회사원, 상업등 가구가 많음
전설 및 설화
- 성참당과 돌고개
영동(永同) 용산(龍山)서 구룡(九龍)재 넘어 저 쪽이 성황당 돌고개 인데밤이면 별똥이 지고승냥이 울다 가는 곳 천년 세월이 가도 그대로 남은 천봉답 불모의 천봉답 성황당 돌고개 3~4월 긴긴 봄 피곤한 오후, 매꾸기가 울어야 보리가 익는다고 기다리는 뻐꾸기는 아직도 오지 않고 보리고개는 저멀리 아득하구나 천봉답 세배미와 아기를 바꾼 여인이 모정을 불태워 통곡하는 밤엔 성황당 돌고개엔 비가 내린다.
해마다 모내는 오월이 되면 영동 관아의 원님께서 이방에게 묻는 말이 있다."성황당 돌고개에도 모를 냈느냐."고.돌고개에 모를 심었다고 하면,"금년에는 우리 영동군에 큰 풍년이 들겠구나"
하고 기뻐서 안심을 했다고 한다.성황당 돌고개는 그만큼 메마르고 척박한불모지이다. 이곳은 첫께, 물이 귀한 것이 흠이다 그래서 돌고개란 이름이 붙은지도 모른다.
이곳의 농민들은 하늘만 쳐다 보는 천봉답만 믿고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이곳은 비가 오지 않으면 일년 내내 농사는백답으로 끝난다 참으로 그들은 어려운 때를살다 갔다.
천봉답! 쇠눈깔만한 천봉답 한 배미일지라도 이 빈농들에게는 금싸라기 같은 소중한 땅이다.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땅이다. 이네들은비록 논둑을 베고 죽을지언정 논을 버리고 떠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도 순박하고 끈질긴 이네들에게 위협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보렷고개다. 3~4월 긴긴 봄날 현기증이 나는데 속없는델레꽃은 왜 저리도 많이 피었노. 델레꽃이필때면 가뭄이 오고 뻐꾸기가 울어야 보리가익는다는 고로(故老)의 말대로 오라는 매꾸기는 오지도 않고 언덕위에는 철레꽃만 피었다.돌고개 사람들은 깡마른 산천에 발을 붙이고 살았다. 산 속에 들어가 송이도 했고, 골짜기를 헤매며 머루도 합다. 고사리 같이 끈질기게 살았고 바위밑 샘물같이 담박하게 살았다.그러나 가난이 이네들에게는 원수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난의 고리는 밑도 끝도 없이순환한다.
화창한 긴긴 봄날, 보릿고개 밑에서 그들은피곤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잡고 뻐꾸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살았다.
여기에서 탄식과 노래가 나왔고 한과 해학이 나왔다. 또 가습을 에이는 애화도 있다.옛날옛날 그 렛날, 모진 흥년에 오리송편만한 천봉답 세 배미와 아기를 바꾼 여인이 타오르는 모정을 못이겨 논둑을 치며 통곡했던 그 밤, 성황당 돌탑 위에 불길이 솟고 장대비가 퍼부어 천봉답을 물바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전해온다.
세월은 많이도 변했다. 이렇듯 찌들었던 돌고개에 지금은 우람한 공장이 들어서서 수출을 서두르는 기계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