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노천리는 백두대간의 정기가 멈추어 선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드는 장교천(長橋川)을 끼고 200여호가 모여 살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동으로 추풍령(秋風嶺), 괘방령(掛傍嶺)을 넘어 도계를 이루며 남으로 우두령(牛頭嶺), 도마령(刀馬嶺)을 넘어 경북 전북으로 넘어가고 북으로는 서울과 부산으로 가는 도로와 철길로 이어지는 곳으로 나라의 한 가운데 해발 210미터의 아늑한 터전이다.
신라 경덕왕 때는 소라현, 1416년에는 황간현, 1895년에는 황간군 오곡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매하면과 오곡면을 합쳐 매곡면 노천리로 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는 면소재지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적량리(赤良里)라 불리었고 마을에 송정이란 아름다운 정자와 오곡서당이 있어 학문을 수련하고 풍류를 즐기었다.
마을 이름은 앞 냇물의 흐름이 느려서 느리내 노내로 불리어오다 노래, 노천(老川)으로 정착되었으며 뒷산에서 흐르는 개천을 경계로 노천상리, 노천중리, 노천하리로 나뉘어졌다.
마을 남쪽 넓은 들 가운데 핏들에서 BC4~2세기 경의 고인돌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돌칼, 돌도끼, 돌화살촉이 다수 출토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을 서편의 산자수려한 능선을 이루는 청룡산의 혈을 이어받아 예로부터 효자와 열녀, 충신과 의병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 뒤에는 달불산이 있어 정월 대보름날이면 달맞이와 달불놀이를 하였다.
동구에는 수령 600여년의 느티나무가 마을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 나무 안에서 젊은 여인의 통곡 소리가 새어 나오고 밤이면 소복한 여인이 나무 주위를 돌다가 사람의 인기척이 나면 나무속으로 들어가 숨었다고 하며 이 여인이 왜병들의 꿈에 나타나 이 느티나무는 효목(孝木)이라 접근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일러주어 마을사람들이 왜병으로부터 화를 면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해마다 잎이 피는 것을 보고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1519년 중종 14년에 손가락을 잘라 부친의 생명을 구한 효자 매한손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며 그 뒤편에 세워진 효자문은 마을뿐 아니라 우리나라 효행의 표상이 되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이 나무에 금줄을 치고 마을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올리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온 마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러 일제의 총칼 앞에 맞섬으로써 군내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마을 앞에 3.1운동 의거 숭모비를 건립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대대로 이 터전에 살아오면서 온갖 역경을 딛고 오로지 지역의 발전을 위하여 서로 돕고 시련을 당할 때는 더욱 힘이 되고 이웃이 되는 대동의 정신을 길러왔다. 가난하였던 시절 보릿고개를 이겨냈고 6.25전쟁의 참변과 태풍 루사 등으로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된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마을의 새 역사를 만들면서 굳건히 이 터전을 지키고 있다.
우리 마을은 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로 도우면서 형제처럼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며 봉사하는 생활 속에 발전을 이룩해 왔다. 이 자랑스러운 전통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마을 사람들 모두의 뜻과 힘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