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본래 영동현의 동동면(東東面)과 서이면(西二面), 남일면(南一面), 북이면(北二面)의 일부지역으로 1909년에 영동군 군내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토금리(土錦里), 구교동(舊校洞), 남정리(南亭里), 동정리(東亭里), 목적동(目赤洞) 일부를 병합하여 영동의 옛 이름인 계산의 이름을 따서 계산리(稽山里)라 하여 영동면에 편입하였다.
행정리는 계산 1리(계산동, 새마을)와 계산 2리(계산리), 중앙 1리(중앙동)와 중앙 2리(중앙동), 영산 1리(영산동, 당말리)와 영산 2리(영산동), 구교동(생기골, 귀골), 금리(토금리) 등 8개리가 있다. 영동읍의 중심지역이다.
계산이란 지명은 고려 성종 때 영동을 계산 또는 계주라 칭하면서 시작된 듯하며, 영동중학교 후문 서편과 영동고등학교 동편에 위치한 새마을은 이름 그대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앙동은 1971년 계산동을 계산동과 중앙동으로 분리하면서 영동읍 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보아 붙여진 이름이고, 중앙동 북쪽의 영산동은 한때 영동의 옛 이름이었던 영산(永山)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산동 북쪽에 있는 당말리는 조선시대에 사직단(社稷壇)이 있던 곳으로 단(壇)이 당으로 발음하기 쉽게 변음된 것이며 말리 → 말랑이 → 말랭이로 단 말랑이가 당말리로 발음되어 지금의 동명이 된 것이다. 보통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校洞)이라 부른다. 따라서 구교동(舊校洞)은 과거에 향교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향교가 1754년에 부용리 성안으로 옮겨가면서 전에 향교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구교동, 또는 향교가 있어 학덕 높은 인재가 나온다는 뜻으로 ‘생기(生起)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산동 북쪽에 있는 금리(錦里)는 마을 뒷산의 형상이 토끼를 닮아서 토령리(兎令里)라 하였는데, 잘못 전하여 토금리(土錦里) 또는 금동으로 변한 것이다.
전설 및 설화
- 영동(永同)할미
영동에는 옛부터 「영동(永同)할미」 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부터 3백여년 전 조선중엽 광해군(光海君) 때에 영동에 한 관리가 있었다. 당시 광해군(光海君)의 폭악한 정치는 말이 아니어서 지방에도 관료 사회의 부패상은 극도에 이르고 있었으며 농민들의 참혹한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바라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피땀 흘려 농사 지어 온 곡식을 관리들은 관청의 힘을 등에 업고 빼앗고 이에 반항하는 농민들은 용서 없이 감옥에 집어넣었다. 세상 민심은 온통 메마르고 관에 대한 불만이 높이 쌓여갈 때였다. 그러나 영동에 살고 있는 한 관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항상 농민편에 서서 농민을 위로하고 동료 관리들의 못된 짓을 앞장서서 말리곤 하였으며,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 쪼개어서 가난하고 병든 마을 농민들에게 약과 쌀 등을 사주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동료 관리들은 이러한 관리의 선행이 못마땅하여 관리가 죽게 만드는데, 관리의 죽음으로 인해 농민들은 넋(죽은관리)을 위로하지 않으면 이 고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 버릴 것이 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군수는 친히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관리들과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피를 토하고 죽은 관리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며칠 동안 지내 주었다. 과연 며칠이 지나자 서서히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하면서 밝은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해마다 관리가 죽은 2월 초에는 어김없이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집을 쓰러뜨렸다. 바람이 불 때는 어머니를 찾는 아들의 울음소리와 자식을 부르는 할미의 통곡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죽은 관리의 혼을 달래주고 원통함을 영원히 풀어주기 위하여 해마다 군수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더니 그때부터는 바람이 멎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